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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57 - 와유(臥遊) - 안현미
와유(臥遊)
- 안현미 -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 『이별의 재구성』(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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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하는 말이지만,
비를 좋아한다.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
비 내리는 날, 창 밖을 바라보면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고, 푸릉푸릉하려는 나무들을 보고, 유리창에 맺힌 방울방울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은 가을비가 급하고 세차게 몇 번 다녀갔다.
나는 옛날을 들여다보기 전에 얼른 자야지.
술을 퍼마시기 전에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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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며칠 전 친구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선후배들을 만났다.
끝나고 맥주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자며 호프집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절친했던 후배 녀석이 이야기 도중 형이 예전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거라. 그러면서 데리고 온 여자친구한테 말하길, "옛날엔 내 주변 모든 여자들이 이 형한테 뻑갔었어. 신사적이고 그래서... 근데 그랬던 형도 이렇게 바뀌네."
그러고 보니 내가 직설적인 얘기들과 자조적인 얘기들을 마구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즐거운 담소 자리였지만, 스스로 성찰하기 시작하니 속으로는 부끄럼이 스멀스멀.
내가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더라?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2.
학교로 돌아오고 나서 처음에 가장 크게 느꼈던 건, 사람들이 정말 맺고 끊는게 확실하고, 직설적이라는 점이었다. 교우관계에서 누구나 조금씩의 불만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학창시절이나 학부 때처럼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넘어가 주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에 반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 행동, 일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런 사실이 있음이 통지되고 경고되었다. 물론 예의를 지키면서 적당한 수준에서 말이다. 그 때문에 가깝다고 생각한 사이에서조차 굳이 그런 식의 지적과 경고가 있음에 대해, 감정적으로 욱할만한 여지도 주지 않았다. 모든 관계는 사회에서 업무가 수행되는 바와 같이 객관적으로 합당하게 처리되었고, 서로 간에 감정은 적당히 통제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게 그런 건지도 몰랐었다. 꽤 여러 친한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대놓고 얘기하는데도 어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 먹냐?"는 말(이것도 물론 위에서 말한 지적과 경고의 일종이며, 관계의 파기를 감수한 표현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업무 파기가 비일비재 하듯이 인간관계의 파기도 흔한 일로 생각한다. 즉,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에 반하느니 기꺼이 관계 파기를 감수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을 듣고서야 대충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때껏 만나지 못했던 이런 집단의 벽, 관계의 벽 앞에서 나는 한동안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느새 그런 태도를 배우고, 동화되고, 이제는 남 앞에서 마구 쏟아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3.
그래서 절감했다. 내겐 좀 더 많은 반성과 사색과 묵상이 필요하다. '좀 더 많은'이란 말을 붙이고 나니 멋쩍은게 요즘 그런 일체의 행위를 해 본 기억이 없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훌륭하지만, 사색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차곡차곡 쌓고 나쁘거나 쓸모없는 생각들을 비워내지 않으면 내가 시간을 들여 무슨 일에 뇌를 굴려본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 그래서 내가 요즘 피곤하다.
#4.
예식장에서 느낀 바는 몇가지 더 있다.
저렇게는 되지 말자는 결심인데, 사람은 자신이 잘 아는 일에 대해서는 말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을 상대해보니 너무 피곤했다. 나도 말이 많은 편인데, 정말 말을 줄여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겸손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잘 아는 일에 대해서는 말이 많아짐은 물론,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건 훌륭한 일이고, 무엇을 잘 아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게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성공 또는 돈으로 존중받고 싶어하고 요즘 세태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만, 또한 사람들은 성공이나 돈 그 자체를 (자신도 이루고 싶기 때문에) 존중할 뿐 그걸 이룬 사람을 그 사실로 존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편 이 지점에서 느낀 바가 컸던 게, 돈을 벌고 성공을 이룬 사람을 그 사실로 존중은 하지 않을지라도 절대 무턱대고 깎아내리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는 그렇게나 노골적인 사람들이, 왜 남의 성공에 대해서는 자신과 반비례관계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나 악담을 퍼붓고, 추측을 전제로 욕을 하는지 모르겠다. "걔는 ~~했겠지. 난 그런 새끼들은 인정 안 해. 걔가 x처럼 바닥부터 시작해서 ~~를 했으면 인정하는데, 걔처럼 ~~하는 건 아무나 다 하는거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단지 속으로, 저렇게 얘길하니 정말 한심하게 들리는구나, 나는 절대 저렇게는 이야기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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