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Law Like Love 2004. 1. 29. 01:30

이런 식은 곤란하다

 

<민법 조항 60% 일본어 직역>

미디어다음 / 이성문 기자

“前項(전항)의 규정은 폭력 또는 隱秘(은비)에 의한 점유자에 準用(준용)한다”(민법 제201조) “주소를 알 수 없으면 居所(거소)를 주소로 본다”(민법 제19조)

이처럼 우리나라 민법 조항 중 약 60%는 일본 민법 조항을 그대로 직역한 문장인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국어연구원(원장 남기심)은 27일 <전면 개정을 대비하여 쉽게 고쳐 쓴 우리 민법>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는 민법 조문 총 1106개 가운데 59.5%에 달하는 659개 조문이 일본 민법을 직역하다시피 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958년 제정된 현행 민법은 11차례의 부분적인 개정이 있었을 뿐 단 한 차례도 전면적인 개정을 하지 않아 제정 당시 썼던 일본어 직역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정확해야 할 민법 조문에 오해의 소지가 생기거나 문법이 맞지 않는 사례가 많다고 이 보고서는 지적했다. ‘없는 때’는 ‘없을 때’로, ‘~에 갈음하다’는 ‘~을 갈음하다’나 ‘~을 대신하다’로 고치는 것이 문법에 맞는 표현인 것으로 지적됐다.

‘빌린 사람’이라는 뜻의 ‘차주(借主)’, ‘빌려 준 사람’을 뜻하는 ‘대주(貸主)’, ‘미성년자를 성년으로 볼 경우’라고 쓸 수 있는 ‘성년의제(成年擬制)’, ‘재촉하는 통지’를 나타내는 ‘최고(催告)’ 등이 대표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한자어인 것으로 나타났다.

‘몰래 감춘다’는 뜻의 은비(隱秘)는 일본어에서조차 잘 쓰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한자어다. 일본식 문체를 그대로 따온 ‘가용(家用)에 공급하고’라는 말은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공급하고 난 후’라고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말에서는 잘 쓰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 거소(居所, 사는 곳)라는 말도 민법에 자주 등장한다.

일본어식 용어를 따라 쓰다 우리말의 품사가 변한 경우도 있다. ‘그 토지의 기타 물건의 소유자와 발견자가 절반(折半)하여 취득한다(민법 제254조 일부)’에서는 우리말에서 명사로 쓰이는 ‘절반’이 동사로 쓰이고 있다.

600여 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 민법에서 <일본국 민법>을 그대로 직역한 부분을 각 조항마다 대조 비교해 놓았다.

연구 책임자인 김문오 학예연구사는 “민법은 우리나라 법률 중 가장 방대하고 중요한 기본법이기 때문에 용어 선택과 문장 기술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이해하기 쉽도록 용어나 문장을 개선한다면 사회 구성원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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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전에 이 기사를 보고 약간 발끈해서.. 여기 퍼놨었다. 비평을 가하려 했으나 그 땐 마침 시간이 없어서 지금에야 쓰게 되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뭐 전체적으로 옳은 말이긴 하다.
우리나라 법전에 온갖 비어, 비문이 난무하는 건 사실이고, 한글화 입법도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전공하는 학문이다보니 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_-;; 저 기사 내용 중 보충이 필요한 부분을 약간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60% 일본민법 문항 직역이라고 해놓은 부분
일단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 근대민법의 시작은 "조선민사령"인데 이건 그 뉘앙스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식민지시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연히 일본민법을 그대로 가져다가 썼다. 단지 관습적 성격이 강하고, 바꿀경우 엄청난 저항을 불러올 수 있는 친족-상속법 부분만을 조선 실정에 맞추도록 하였다.
그 후 새로운 민법이 제정될 때에 구민법을 참고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그대로 베낀 수준의 부분이 있지만, 법이라는 게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기본적인 베이스 룰이 된다고 보면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가치는 비슷하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같은 내용의 조항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의 근대 법제사는 계수(繼受)의 역사라고 법학계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런 면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면 '계수'도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말이네.. -_-;;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이어받는다는 말이다.) 기사와 연구에선 일본민법과 비교를 했지만, 그 일본민법도 게르만법을 상당부분 계수한 것이고 지금의 독일민법과 우리민법을 비교해도 50% 이상의 직역이라 할만한 조항들이 널려있다.
건전한 비판은 좋지만 언론에서 교묘한 뉘앙스의 왜곡으로, 저렇게 국민들을 자극하려는 선정적 기사(제목만 봐도 의도가 불순하다 -_-)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정말 좋지 않다.

두번째는 국립언어연구원의 연구도 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단순히 국어학적으로만 접근한 경향이 있다.
법학에서는 문구하나, 말의 토씨하나가 결과를 정반대로 바꾸어 놓는 일이 가능하다. 그래서 의미가 명확한 한자어를 선호하지 않나 싶다. 특히 기사에서 나온 '성년의제'라는 말을 보자. 기사에서는 간단히 '미성년자를 성년으로 볼 경우'라고 고쳐쓸 수 있다고 했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법에서는 '의제(간주)한다'라는 말과 '추정한다'라는 말을 명확히 구별하여야 한다. '추정'은 반증이 있다면 뒤집고 법률효과를 저지할 수 있지만, '의제'나 '간주'는 반증이 있어도 뒤집을 수 없고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냥 "~ 로 본다"라고 하면 간주인지, 추정인지가 불분명해진다. 실제로 법조문에서도 "~로 본다"라고 되어있는 조문이 많은데, 차라리 의제나 간주 또는 추정으로 명확하게 써주는 것이 의미구별엔 더 쉽다.
또 한가지, 거소(居所)란 말도 그렇다. 기사에서는 단순히 '사는 곳'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법적으로는 '주소'와 '거소'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개념이다. 주소는 사람이 살면서 생활의 근거지가 되는 곳이어야 하는데, 거소는 머무는 곳이긴 하지만 생활의 근거지의 수준에 미치지 않은 곳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거소(居所)'를 '사는 곳'으로 표현한다면 '주소'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이 국어학적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법학계에서도 저런 말들을 통해 나름대로 사실관계의 정확한 파악과 표현을 꾀한 것인데 무턱대고 일본식한자라서, 실생활에서 잘 쓰지 않아서 바꾸자고 한다면, 오히려 분쟁해결에 있어서 용어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법관의 올바르고 정확한 판단이 방해받을 우려가 더 커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저런 게 좋은 건 아니므로 앞으로는 법학과 국어학이 서로에게 다 좋은 접점을 찾아내는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이래서 공동 연구의 활성화가 필요한 거구나 싶다.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자면, 법이라고 하면 무조건 어려운 척하려한다, 고상한 척하려한다라는 일반인들의 선입견이 매우 강한데 실제 그런 측면이 조금 있긴 하지만 -_-;;, 그렇지 않은 면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한자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의미구별을 위해 한자를 써야하는 경우도 있고(이때는 한자를 쓴다기 보다는 의미구별을 위한 일종의 기호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또한 의미의 명확화를 위해 한자가 꼭 필요한 경우도 많이 있다. 나 같은 경우도 요즘 법서들을 보면 한글화가 많이 되어 이제는 한자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는데, 공부를 하다보면 그냥 한글로만 써있어서 의미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이런 단어는 괄호에 한자를 좀 넣어주지, 하고 생각했던 적이 꽤 많이 있었다.
그리고 법조계, 법학계에서도 한글입법과 법의 생활화, 쉬운 법 만들기는 커다란 화두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앞으로 개정되는 법들은 대부분 한글 입법이 될 것이다. 실제로 재작년에 개정된 민사소송법은 완전 한글입법을 이루어 내었다. 또한 요즘 실생활과 직접 관련된 법들은 한자를 쓰지 않는다. 기본법 외에 시행령이나 시행규칙들은 모두 한글입법이 되고 있다. 게다가 법서(법전공서적)들도 예전엔 은, 는, 이, 가 빼놓고는 모두 한자로 써져 있다고 했었지만;;; 요즘은 완전 한글판 책이 대부분이다. 사법시험도 한자를 아예 쓰지 않으며, 사법시험 답안을 쓸 때에도 요즘은 한자를 쓰지 말 것을 오히려 장려하는 추세이다. (괜히 썼다가 틀리면 감점당한다고;;;)

많은 부분에서 저렇게 노력하고 있으니, 기사의 연구원의 말대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한걸음더 다가가는 법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저런 선정적 기사들은 법학 전공자들을 두번 죽이는 일이라는... ㅡ_ㅡ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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