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Law Like Love 2008. 12. 18. 23:25

법에도 품격이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사르코지 대통령에 대한 주술인형의 판매를 허용하는 판결이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잇따라 내려졌다.

아래 영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형은 사르코지를 본따 만든 것으로, 몸통에 주술 주문이 적혀있고, 바늘로 찌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를 K&B란 출판사가 2만개를 만들어, 어디를 찔러야 사르코지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지를 설명한 메뉴얼과 함께 개당 12.95유로(약 2만 3천원)에 판매하였고,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 10월 이 판매행위가 초상권 침해라며 '판매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프랑스 법원은 1심에서 ① 인형 판매는 표현의 자유와 유머의 권리에 해당한다. ② 공인의 초상이 담긴 '그림'은 초상권을 인정할 수 없다. ③ 주술인형이 당사자에게 실제로 해를 가한다는 어떤 증거도 없으며, 따라서 그 인형이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하였다.
2심에서도 마찬가지로 기각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붙었는데, 앞으로 판매될 인형에 "(인형을 찌르는 행위가) 사르코지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공격에 해당할 수 있다"는 내용의 경고 문구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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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법원의 이러한 판단을 보면서 요즘 시국에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국민인 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저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정치인은 어떻게 반응했을 것이며, 사회 각계와 여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에 대한 평가와 가치형량은 온데간데 없고, '주뎅이'니, '저질'이니 하는 말들만 난무하지 않았을까?
(글을 쓰다보니 실제 그와 비슷한 사건이 생각나고 말았다. 1998년 김홍신 의원의 이른바 '공업용 미싱'발언. 난 그 당시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그 발언이 왜 그렇게 사회적으로 매도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이를 웬만큼 먹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각 언론사 및 시민단체가 선정한 15대, 16대 국회의원 의정활동 종합평가 1위, 국정감사 최우수 의원 8년 연속 1위를 한 김 의원이 아닌가. 아무튼 김홍신 의원의 우스갯소리라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법원 또한 모욕죄와 선거법상 후보자비방죄를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했고, 김 의원은 우여곡절 끝에 이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몇 년 후 의원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야했다.)

그에 비해 프랑스를 보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판매금지를 요청하면서도 그 사유로 명예훼손 운운하지 않고 초상권을 든 것부터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게다가 법원은 표현의 자유 뿐만 아니라 유머의 권리를 직접 언급하는 저 모습, 그리고 항소심 법원은 조건에 인간의 존엄성을 언급하면서도 실제 행동에 대한 판단과 책임은 국민 개인에게 맡기는, 그야말로 국민의 인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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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회당 당수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루아얄의 인형도 함께 나왔으나 그녀는 어떤 법적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실 루아얄 인형은 너무 예뻐서 별로 찌를 마음이 들지 않는다-_-;;;)


오늘 아침, 나는 신문에서 또 다시 시위에서 마스크 착용 금지를 골자로 한 집시법 개정안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대표발의한 신지호 의원에 따르면 집회에서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 개정의 이유라는데... 마스크 착용과 불법행위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발견해 내는 의원님의 고도의 지적능력은 차치하고라도, 이 법안이 실제 시행되면 앞으로 성적 소수자나 HIV감염인, 성매매 여성들은 아예 시위라는 최후의 방법에 호소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약자 계층들 또한 약자라는 구조적, 계급적 차별 시정을 위한 호소에 나서기 힘들 것이다. (세상 누가 전 지지리도 못사는 사람인데요, 하며 얼굴을 빤히 내놓고 집회에 나오고 싶어하겠는가.) 표현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아예 말살하는 이런 내용이, 정치적 논쟁 수준이 아니라 버젓이 법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바로 21세기의 대한민국이다.
위의 프랑스처럼 표현의 자유와 법의 규율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인 진지한 성찰도 없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100만명이 모여도 해 진 뒤에 서 있으면 모조리 불법이며, 인터넷 댓글조차 사이버 모욕죄라는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죄목으로 처벌하겠다고 협박하는 우리나라...

혹자는 저런 주술인형을 가지고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를 저질이라고, 품격이 떨어진다고 욕할지 모르겠으나(사실 나도 저런 블랙코메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나라가 저런 행위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규율하고 담아내는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새삼 법에도 품격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의 사례에선 그런 느낌을 거의 얻지 못한다는게 너무나 가슴이 아프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