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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8
< 성 탄 제 >
- 김 종 길 -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庾)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庾)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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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난,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모두 살아계시다는 게 자랑이었다. 지금이야 우습게 들리지만, 아이들의 세계에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소중할 때도 있다. 그 시절은 그런 법이다.
어렸을 때의 4가지 자랑거리 중에서 이제 나에겐 한 가지 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변하는 것인지, 자랑거리를 하나 잃어버릴 때마다 지금의 난 슬픔과 더불어, 언제 때가 올 것인가 하는 안절부절함이 가심 - 심하게 말해 어쩌면 홀가분 함 - 을 또한 느끼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닌, 이런 일말의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어보는 모습에조차 치를 떨었겠지만 세상은 산 자에게 보다 가혹하다는 걸 알아버렸고.. 요즘 우리사회란 곳이 나같은 장남∙장손에겐 주는 것 없이 의무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버렸음도 변명이 될 수 있으려나.
전에 내 아버지께서 몸이 많이 아프셨을 때도 딱 이 맘 때였다. 난 그 때 저 시를 자주 떠올리곤 했었다. 이번에 할아버지께서 아프셨던 것도 이상하게 이 맘 때다. 지금 내 아버지의 마음 속엔 나보다도, 저 시보다도 더한 울림이 메아리치고 있겠지...
* BGM : 유클립투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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