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04. 1. 7. 10:20

과정의 거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일반사회 시간에 배운 것 중에 이런 게 있다.
사회구성원 또는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데에는 절차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공통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저런 비슷한 내용이다. 그리고 저런 것 외에도 우리들은 적어도 초등학교시절의 바른 생활에서부터 시작해서 도덕, 윤리시간에도 '결과보다는 과정'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고, 달달 외워왔다. 한데 이 사회는 어떻게 된 것인지 어린 시절에 그렇게나 배워 온 '합의도출의 과정'이란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질 않는다.

내가 보기에 국가 또는 대통령이 하는 일은 규모가 큰 일들이고, 이해관계가 여러갈래로 얽혀있으므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의견들이 다양하게 나오는 모습은 순식간에 '리더십 부재'로 매도되고 '경박함'으로 치부되고 만다.
국회에서 하는 일도 그렇다. 어이없는 이유로 등원거부를 하니, 쌀뜨물쇼를 하니, 하는 것들은 별문제로 치더라도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 간에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가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점들은 또 '국회파행'이라는 한 마디로 뭉뚱그려지고 마는 것이다.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는 걸 본 일이 있는가? 1개 법안을 처리하는데 본회의에서는 단 20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물론 법안이 본희의에 올라오기 전까지 많은 절차가 있지만 그 절차들에서도 심도있게 논의되는 것들은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아무런 견제 없이 대충대충 처리되는 법안들을 보면서 국회가 그나마 민생법안을 챙긴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런 과정의 거부 현상 또는 결과 맹종 현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뼛 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 있는 군사문화에서 유래한 듯 하다. 군대에서는 하는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결과만 나오면 모든게 OK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군사독재에 30년이나 길들여진데다, 인생의 가장 한창 때에 군대에서 몸과 마음 모두를 3년동안이나 그렇게 세뇌 당하고 오는 이 땅의 사람들이니, 무슨 일을 하든지 잡음이 있거나 당장 잘 안된다 싶으면 도저히 받아들이질 못한다. 무조건 일사분란, 빠른 결과, 가시적 성과 이것만이 지고지존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난 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아서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라는 정치는 그 개념적 속성상 항상 '과정'에 최우선의 초점을 맞춘다고 생각한다. 즉, 사회는 결국 이렇게도 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봤다가, 삐걱삐걱하면서 위태위태하지만 결국 어떻게든 돌아가는 것이며, 제 갈 길을 찾는 것이고, 정치의 포커스는 '마침내 돌아간 그 결과'가 아니라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이 재미있는 것이고 이 세상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끝까지 '탈권위(=과정의 활성화)'를 '경박'이라 칭하면서 과정을 거부하고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는 걸 참지 못하는 이 땅의 많은 아저씨들은 아직도 군사독재시절의 서슬퍼런 압제에 사로잡혀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인간을 그리도 믿지 못하는 것인지...



* BGM : I Beli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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