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05. 10. 2. 19:45

[중앙 시평] 말이여, 넥타이를 풀어라

"시하이껴?"

어릴 적, 내 고향 경상도 북부 사람들이 흔히 쓰던 말이다. 한자를 나란히 써주지 않으니 무슨 외국어 같다. '시하(侍下)'. 이렇게 한자를 병기해 봐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조부모나 부모를 모시고 있느냐는 뜻이다. 조부모, 부모가 다 생존할 경우에는 '층층시하(層層侍下)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버지만 생존해 있을 경우에는 '엄시하(嚴侍下)', 어머니만 생존해 있을 경우에는 '자시하(慈侍下)입니다'고 대답해야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는다.

"안항이 몇인고?"

역시 외국어 같다. '안항(雁行)'. 이렇게 한자를 병기해 봐도 외국어 같기는 마찬가지다. 기러기가 간다? 형제자매가 몇이냐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 알아듣고 적절하게 대답할 줄 안다. 나는 이런 옛말과 인터넷 사투리의 중간에 위치하는 세대다. 인터넷 사투리에 익숙해진 내 아들딸에게 이런 말은 외국어나 다름없다. 나는 아들딸에게 이런 말을 가르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나는 아들딸에게 이런 말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

이것은 소통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희 동아리를 과시하고 타인을 소외시킬 목적으로 악용되는 권위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 악용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다른 지방에서 우리 고장으로 장가들어 오는 새신랑들이었다. 말귀 알아듣지 못하는 새신랑이 사람대접을 받기까지는 퍽 오래 걸렸다.

"아버지, '피복 지급'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옷을 준다는 뜻이다."

"아버지, 그럼 '급료 수령'은요?"

"월급 받아 가라는 소리다."

"왜 그렇게 쉽게 쓰면 안 되지요?"

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입대한 아들과 나 사이에 실제로 오간 대화다. 사람들은 왜 어려운 말을 즐겨 쓰는가?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말을 씀으로써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는가? 말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포기하기 싫은, 달콤한 권력에의 유혹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나는 건설 현장을 떠돌아다니는 일본어를 한 6개월간 집중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다. 일본어를 알지 못하면 기술자 대열에 합류할 수 없다. 기술자들은 저희끼리, 일용 근로자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 나는 건설 현장의 일본어를 습득함으로써 단기간에 권력자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런데 3년 전, 집수리를 했다. 내 집이 공사판 노릇을 한 것이다. 일용 근로자들에게 기술자의 언어는 여전히 외국어였다. 그러니까 나는, 근 35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토막 일본말들이 여전히 권력의 도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공사판 기술자들이 무식해서 그렇다고? 천만에. 신문사 편집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두 번 확인한 것이 아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새내기는 한동안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나는 일본인들의 조잡한 조어(造語) 솜씨를 많이 비웃은 사람이다. 중국이 문자 고고학적 집적(集積)이라고 할 수 있는 한자를 간체자(簡體字)로 바꾸었을 때도 나는 많이 비웃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비웃지 않는다. 소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통이다. 반평생 영어만 끼고 살아온 내가, TV 토론자들이 쓰는 영어 앞에서 쩔쩔매는 것은 여전히 영어에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치자. 반평생 글만 써 온 내가 군청에만 가면 쩔쩔매는 것도 한국어에 무식해서 그런 것인가?

글 부리고 말 부릴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묻는다. 소통을 원하는가, 과시를 원하는가? 한 고위 공직자의 말이 가볍다고 온 나라가 야단이다. 무엇이 놀라운가? 그 공직자는 과시적 언어라는 이름의 넥타이를 풀었을 뿐이다.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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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아.. 좋은 칼럼이라 읽고 느낀 점들을 아주 길게 밑에 붙였더랬다. 하지만 OK를 누르자 사용권한이 없다는 표시가 나오며 그냥 다 날아가버렸다. 로그인이 자동 해제되었더군ㅠ.ㅠ(역시 내 컴퓨터 아닌데서는 이런거 쓰는 걸 말았어야했다.) 절망적이다. 다시 쓰는 건 도저히 못하겠다. 큭.
오랜만에 정치발언 좀 하려했더니.. -_-

어!!

11/05

나도 이거 읽고 '좋아!'라고 생각했었는데... 꿀꿀인 내 취향을 너무 따라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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