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03. 3. 24. 11:54

아로새기다

어제,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휴게소에 들어갔을 때였다.

새벽에 출발했기 때문에 버스 탄 내내 난 대자로 뻗어서 잠을 아주 '퍼'자고 있었고, 휴게소에서도 사람들 다 내려서 화장실에 갔다 올 때까지 여전히 몽롱한 상태로 함 내려볼까말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화장실에 갔던 사람들이 어느정도 돌아오자 갑자기 한 아저씨가 올라오시더니 번호표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앞에 서서는 사은행사가 어쩌고 특별 이벤트가 어쩌고... -_-;;;

요즘도 이런 걸 하는구나 싶었다. 순간 어렸을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ㅋㅋ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무지하게 어릴 때였다. 엄마랑 동생들이랑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중이었는데..(뭐.. 가봤자 시골에 가는 것이었을게다 ㅋ) 그럴 때는 항상 엄마가 막내를 안고 둘째 동생을 옆에 앉히고 나는 통로너머 그 옆 자리에 딴 사람과 앉아야했다. (물론 싫었지만 장남이라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어릴 때에도 난 그런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있었다.ㅡ_ㅡ;;)

음.. 암튼, 딴 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때 어딘가에서 아저씨들 세 사람쯤이 올라와서 번호표를 막 나눠주었다. 그리고 금빛이 번쩍번쩍하는 시계를 들고 대롱대롱 흔들면서, 앞에서서 당첨번호를 부른다고 하더니 내가 가진 번호를 딱 부르는 것이었다. @.@ (원래 나눠준 번호는 절대 안부르는 것인데, 그 사기꾼들이 그 날따라 뭘 잘못먹었는지 착각을 했었던 듯 싶다)

오오~ 난 어린 맘에 정말 기뻐서 그 아저씨가 내 옆에 오길 기다렸다가 '아저씨 이거요...'하면서 번호표를 슥 내밀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아저씨가 난 본 척도 안하고 그 번호표를 딱 뺏들더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휘리릭 내려버리고 버스는 출발하고 말았다. 오오~ 그럴수가 ㅋㅋㅋ

머.. 어린 마음에 그 일이 크게 남긴 남았었나보다. 작게 잡아도 15년이 넘은 듯한 일인데 휴게소에서 그런 아저씨를 다시 보게 되니 바로 일케 생생하게 기억이 나다니 후후후


아로―새기다[타동사]

1.(무늬나 글자 따위를) 솜씨 좋게 새기다.
¶ 십장생(十長生)을 아로새겨 놓은 문갑.
2.(마음에) 또렷하게 기억해 두다.
¶ 감명을 아로새겨 준 영화./선생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다.

마음에 새긴다는 (새긴 것이든 새겨진 것이든.. -_-;; 아까의 경우는 새겨진 것이겠지만..) 것, 참 대단한 일이다.


흠..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자면,
또 아까의 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내릴까 말까 하다가, 그 아저씨가 올라와서 그러고 계시니 시끄럽기도 하고, 운동도 좀 해야할 것 같고, 어렸을 땐 그런 아저씨가 글케 무섭더니 이젠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서 -_-;;;; 걍 내려서 화장실에 갔다오기로 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왠 싸이언이라고 가슴에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외국인을 본 것이었다. 신기해서 가만히 쳐다보니 신의손인것 같았다. *ㅁ*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네.. 저렇게 닮은데다 옷까지 저런 걸 입고 다니다니 -_-;;; 닮은 걸 알고 일부러 저러고 다니는건가?'라고 생각하면서 버스로 돌아왔는데...
글쎄~ 울 버스 옆에 안양 LG 치타스라고 앞에 써붙인 버스가 4대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커헉~ 쿨럭..

갑자기 광적인 축구팬의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앗! 안양LG라면 최용수가 일본으로 날랐고, 땡표가 네덜란드로 날랐지만 아직도 최태욱이 있고 올핸 정조국이란 놈까지 가세한 그런 팀이 아닌가..'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쳐버린 것이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거의 본능적으로 퍼더덕하고 버스들 중 첫번째에 올라타따.(그렇다고 내가 닭은 아니다 -_-;;) 근데 다들 화장실을 갔는지 거의 사람이 없어따. 그래서 두번째 버스로... 흠흠

근데.. 두번째 버스에 딱 올라타는데 앞에 앉아있던 왠 놈이랑 눈이 딱 마주친 것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눈이었다. '대단한'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을 듯한 그런 눈빛이었던 것이다. ㅡ_ㅡ;;; 순간적으로 빽 쫄아서.. (글고 또한 순간적으로 임기응변을 발휘해서) "어, 이 차가 아니네.."하면서 내려따. ㅎㅎㅎ

결국 최태욱도 정조국도 못 보고, 싸인도 못 받았지만ㅠ.ㅠ
아무튼.. 축구 선수들이 저런 눈빛들 속에서 경기를 한다니 오오~ 정말 대단하다, 하고 느꼈다. 우리 선수들이 국내에서 정말 잘하다가 해외에서 쩔쩔매곤 했던 것이 저런 눈빛에 압도당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선수들의 눈빛도 저 정도일진데, 그 눈빛을 압도하는 양키들의 눈매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음... 아무튼,
그 눈빛이 또 내 마음에 아로새겨진 듯 하다. 그런 눈빛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다! 쿠쿠




* BGM : Atomic Kitten - The tide is high


* ⓦⓘⓝⓓ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08-0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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