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06. 6. 15. 20:05

전쟁, 승자, 여유

토고와의 경기, 그 승리의 환희가 하루 반이나 지나고 난 후,
이제서야 겨우 토고가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미 전쟁이 되어버린 월드컵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 것일까?
(실은 글 처음에 무심코 토고'전'이라고 쓴 것을 지금 보고 얼른 고쳤다. 무의식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戰임을 선언하는 나, 그리고 우리들을 보라!)

경기 전 토고선수들이 출전수당 문제로 자국 축구협회와 마찰을 빚자, 마치 마녀사냥하듯이 그 선수들을 '이기적인 껌둥이들'로 몰아가던 우리의 언론들, 그리고 우리의 시선, 싸늘한 시선.
경기에서 토고선수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건 참 순박해보이고, 경기장에서도 착하다는 것이었다. 경기에 지면서, 그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파울을 받을 때에도 두 눈을 껌뻑거리며 애처롭게 쳐다보기만 하는 그들, 그들의 순박하고 그 큰 눈.
그런 그네들을 한순간에 이기적인 껌둥이로 만들어버린 그 대단하신 수당이란게 고작(?) 1억 8천여만원을 요구한 것이었는데..

경기 매너도 좋았던 토고 선수들

물론 큰 액수이긴 하다만, 그 선수들을 그렇게나 나쁜 사람으로만 만들 수 있는가?  동경해마지않는 서유럽의 그 잘나신 선수들이 연봉만 80~100억원을 받으며, 이적료는 1000억원을 호가한다는 사실에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선망을 가득 담아 찬양하기에만 바빴던 그들이 말이다. (참고로, 현재 최고 리그로 꼽히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선수 평균 연봉은 25억원 가량되며, 작년 축구선수 중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데이빗 베컴은 320억원을 벌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축구선수들은 부족대표의 성격도 겸하고 있고,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돈은 부족-민중들을 먹여살리는 밑거름이 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행태를 보건데, 토고 축구협회도 썩어빠진 똥물일 것이고, 그들이 결국 줄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야 할 돈을 중간에서 장난을 치다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 뻔한 이상, 토고 선수들을 무작정 욕할 수는 없다. 결국 불쌍한 사람들, 불쌍한 나라가 아닌가! (우리 언론이 얼마나 저열한 자본본위적 시각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태이기도 하다. 잘 사는 나라에만 호의적인 사람들, 언론들.)

날 더 안타깝게 하는 것은, 경기 전엔 그렇게나 토고선수들을 마녀처럼 몰아붙이던 언론이 우리나라가 이기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들이 불쌍하다는 둥, 이래서 잘 살고 봐야한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것이다. 그래, 뭐 그런 값싼 동정심이나마 가져주는 것도 그나마 좋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경기에 졌어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승자의 여유란 것이 이렇게 궁색하고 민망해 보이는 건 줄은 몰랐다.

내가 바라는 우리나라는 스포츠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상대국이 가난한 나라-고통받는 나라라면 긍휼이 여길 줄 아는 그런 나라, 스포츠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보고, 승패에 관계없이 경기자체를 즐기며, 스스로 기뻐하는 국민들을 가진 그런 나라, 일개 스포츠 토너먼트에 온언론이 개발광하지 않는 그런 나라, 그래, 딱 그런 나라이다.

'Random Though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해를 같이 하다  (0) 2006.07.04
어쩌면  (0) 2006.06.26
한미FTA 협상 시작  (0) 2006.06.06
선거 後  (5) 2006.06.01
5.31 - 목불인견  (0) 2006.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