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09. 1. 3. 22:11

머저리 클럽

“소림이에게 만나자고 편지를 썼어. 그리고 우리는 만났지. 첫날 우리는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같이 봤어.”

헤드라이트 켠 차들이 윙윙거리며 달려와서는 조그맣고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 두 명의 모습을 순간 밝혔다가 스러지고는 했다. 누구네 집 담일까. 긴 돌담에 기대어 우리는 겨울 추위보다 더 무섭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우리는 이틀마다 만났어. 난 널 볼 때마다 내가 소림이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건 정말이었어.”

“거짓말 마!”

내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내게 무엇이 다가오는가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내 눈 위에 흐르는 부끄러운 눈물. 사내놈이라면, 열여섯 살 먹은 사내놈이라면 좀처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눈물 두어 방울을, 아아, 창피하고도 창피스럽게 굴러 떨어뜨리면서 나는 점퍼 깃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난 비겁한 녀석이야. 난 그것을 알고 있어.”

영민이가 교묘하게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겨울의 찬 공기 속으로 서릿발이 뻐글뻐글 솟아오르며 사라져갔다.

“난 네가 소림이를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동순아…….”

그는 말을 끊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소림이를 좋아하고 있어.”

나는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것이, 그의 말이, 내가 기댄 돌담이, 겨울의 추위가, 소림이가 내가 주저하고 있는 동안에 영민이를 만나주었던 그 수많은 역설이 무서워져서 돌담의 차디찬 벽을 아프게 쥐어뜯고 있었다.


- 최인호,『머저리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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