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08. 12. 6. 00:29

차선변경

#1.

명절의 귀성전쟁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아는지?
지금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명절 때 전국의 주요 도로들을 차들이 가득 메워 버리는 상황은 20년 전엔 찾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80년대 후반 갑자기 명절 때 차들이 고속도로에 주차를 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수도권 인구집중과 급속한 도시화, 자가용의 본격적 보급 등 여러 이유도 있을 것이고, 이게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일도 아니겠으나, 우리 가족이 시기를 특정해서 이 사실을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 가족도 때마침 그 때쯤, 귀성전쟁의 발발 때부터 참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

명절의 귀성길은 어른들에게는 지옥이지만 사실 어린이들에게는 신나는 일이다. 일단 자동차를 탄다는 사실 자체도 즐겁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웅대한 감성을 가지기도 하며, 게다가 평소에는 절대 어머니께서 사주시지 않는 휴게소의 MSG를 다량 함유한 그 온갖 별미들!
그리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평소엔 엄마, 아빠와 하루종일 함께하기가 어렵지만, 귀성길의 좁은 차안에서는 하루종일 부모님과 딱 붙어있을 수가 있잖은가. 이게 어린 나에게 무의식적인 안정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귀성길을 즐거워하는 아이에게도 단 한가지 불만스러운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차가 가는 차선보다 항상 옆 차선이 차가 잘 빠진다는 사실이다.(이 현상 자체는, 과학적 연구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이다.) 도로정체 자체는 별로 짜증날 것이 없으나 어린 생각엔 항상 머리 속으로나마 다른 차들과 경주를 하게 마련, 나 역시 다른 차들보다 우리 차가 더 늦게 간다는 사실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린 나는 항상 아버지를 닥달하곤 했다.
"아빠~ 옆 차선이 더 잘 빠져요. 빨리 옆 차선으로 가세욧!"

하지만 어린이들은 이 지점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아까 우리 차의 옆 혹은 뒤를 달리던 차들은 이미 우리 차보다 앞서 간 뒤다. 우리 차가 이제와서 옆 차선으로 변경해 빨리 간다고 해도 그 차선 안에서 그들은 영영 따라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잘 나가는 옆 차선을 마다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현 차선을 마냥 고수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일단 조금이라도 전전하려면 차선을 바꾸는게 옳은게 아닐까? 하지만 이 자리를 뚝심있게 밀고 나간다면, 언젠가 이쪽 차선도 정체가 풀려서 아까 우릴 지나친 차들을 따라잡거나 따돌릴 가능성도 있잖은가? 결국 이기기 위한 레이스라면 그 가능성에 올인하는게 맞지 않을까?


#3.

명절의 귀성길과 어린시절의 딜레마를 떠올린 것은 퇴근시간 한강대교 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서울 모든 도로가 다 그렇지만 퇴근시간이라 길은 무지무지 막히고 있었고, 게다가 버스는 4차로 중 2차선에 서 있었는데 1,2차선은 아예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나마 3,4차로는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는지라 아예 움직이지 않는 차선에 서 있던 나는 짜증이 팍팍 밀려오기 시작하며 저 위의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직도 난 유치하기 짝이 없다 ㅠ.ㅠ)


#4.

하지만 꽉 막힌 차로를 바라보며 드는 짜증보다 더 내 마음을 울렸던 것은 요즘 내 인생의 항로가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길은 꽉 막혀서 앞이 보이지 않고, 내 옆에서 같이 서 있었거나 심지어 내 뒤에 서 있었던 이들도 이미 나를 지나쳐 저 멀리까지 가 버린 뒤다. 이제 와서 나의 길을 버리고 그들을 쫓자니 두렵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나를 고민하게 하는 건, 이미 같은 선로에선 단기적으로 그들을 뒤쫓거나 추월하는 건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다.


#5.

그렇다고 꽉 막힌 이 길을 그저 고수할 것인가?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나를 둘러 싼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 고민이여!
물론 인생이란게 그렇게 일직선의 차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가다보면 한참 앞서가다가도 사고가 나서 다시 뒤처지는 사람이 있으며, 휴게소에 들리는 사람도 있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잠을 자는 사람도 있는데다, 아예 이 도로를 벗어나 다른 도로를 찾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이 도로의 끝에 화려하게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닌 사람들도 많다. 인생은 새옹지마란 사실은 젊은 나의 짧은 경험으로도 확실히 진리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이 주는 일종의 위로감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저런 이야기를 하며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쉽게 인생의 차선변경을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저 인생의 진리를 내가 완전히 믿기 때문인지, 또는 그건 억지합리화에 불과하고 열정과 패기를 포기한 채 그저 일신의 작은 안온함을 구걸하기 위함인지를 분별해 낼 재간이 나에겐 없다.

딜레마는 새로운 딜레마를 낳고, 고민은 또 다른 고민을 낳으며
인생의 굴레는 세차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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