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08. 7. 31. 23:43

소소한 기억

이청준 선생님께서 돌아가셨구나.
선생님 타계 기사를 보고 있노라니 예전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예전에 재수생 시절 노동일보 기자분과 인터뷰를 할 일이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아마 9월쯤이었던 것 같은데... 구로에 있었던 노동일보사로 찾아가서 기자를 만났다. 인터뷰는 간단히 끝났고, 약간 뻘쭘한 채로 기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책 읽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좋아하는 소설가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긴 너무 쪽팔렸고;; 고전문학작가를 이야기하려니 어린애도 아니고 좀 유치해 보이는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고민을 좀 했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게 문학 교과서에 실려서 아주 감명깊게 읽었던 <눈길>이었다.
"이청준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나의 이 이야기에 기자분은 갑자기 생기발랄해지시더니 "작품은 어떤 걸 읽어보았냐?", "어떤 점에서 마음에 들더냐?", "사실 재미는 없지 않냐?" 등등 질문을 마구 쏟아내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내가 읽어 본 이청준 선생님의 작품은 앞서 말한 <눈길>과 역시 교과서에 실렸던 <병신과 머저리>밖에 없던 터였다. 그 기자분께서도 질문을 계속 하시다가 이내 내 밑천을 대강 알아채 버렸고, 나중엔 내가 부끄러워하는 걸 눈치까지 채시고는 수습해주려고까지 하시지 뭔가. "아니 전 어린 학생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청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많이 놀랐거든요. 저랑 좀 친하신 분이기도 해서..." (아이고 머리야 ㅠ.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부끄럽다.)
이청준 선생님에 대해 쥐뿔도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는 놈이 잘난 체 좀 해보려다 된통 잘못 걸린 셈이었다.

지금까지 그 일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 건 그 때 느낀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난 말이 많고, 과시욕이 강한 사람이지만 그 후로 '난 이런 것도 읽어보았다!'라며 떠들고 다닌 적은 없었다.
대학 입학 후 도서관에서 이청준 선생님의 작품을 일부러 많이 읽은 것은 물론이고...

이제 와 곰곰히 생각해보니 완전히 폐인생활을 했던 대학 1,2학년 때 그나마 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버릇을 들이게 해 준 분이 이청준 선생님인 것 같아 새삼 고마움이 느껴진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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