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05. 5. 22. 00:17

詩10

독을 차고

- 김영랑 -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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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특히 많이 생각나는 시다. 정말 내 속에 독이 가득 가득.

중학교 때였는지 고등학교 때였는지..
아무튼 이 시를 먼저 접했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시를 쓸까, 어떻게 이런 소재로 시를 쓸까.. 독이라니, 게다가 독을 차다니. 독을 품는 것도 아니고 먹은 것도 아니고 차다니.

하지만 이상했다. 이 시는 정말 신기했다. 머리 저 구석에 철썩 들러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내 가슴에 독을 찬지 오래로다.'
'허무한듸!'
'허무한듸!'
단어 하나하나가 울렸다.

결국 난 이 시를 좋아했던 것이다. 가끔 어줍잖게 시랍시고 써 볼 때가 있는데, 스스로 내 시에서 이 시의 영향을 많이 발견하고는 놀랄 때가 있다.
게다가 내 마음도 이와 같은데.. 그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김영랑 시인은 정말 천재시인이며 大詩聖이다.

특히, 시의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라는 구절,
아.. '선선히' 가다니. 게다가 '가리라'니..

정말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존모하게 되는 그런 시. 최고로 매혹적인 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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