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 Thoughts 2012. 3. 27. 14:39

치료하는 책

김경욱 - 「위험한 독서」 中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교육론의 고전 에밀을 집필한 루소가 제 자녀들을 고아원에 보냈다는 가십은 들은 자리에서 웃고 잊어라. 학장의 어린 딸 앨리스를 위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과 교수 루이스 캐럴이 독신으로 살지 않았다면 과연 그런 책을 펴냈을까 하는 공상은 가급적 빨리 접어라. 독서를 통해 당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은 교묘하게 감추어진 저자의 개인사나 메시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니까.

당신에게 나는 어떤 책을 권해야 했을까? 당신이 만일 중년사내와 부적절한 교제를 하는 미성년자였다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권했을 것이다. 임신중절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조교제를 시작한 여학생에게 읽혔더니 돈을 받고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던 중년사내와의 관계를 끊었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그 여학생은 자신을 돌봐줄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게 될 것이다. 내년 여름에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 지금은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단다. 만일 당신이 지켜만 보는 사랑으로 가슴앓이하고 있다면 콜롬비아 작가의 소설을 추천했겠지. 당신이 평생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눈감을 때 다음과 같이 탄식하지 않도록. 내가 죽는 것이 가슴 아픈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세상의 속물스러움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삶은 살 만한 값어치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어서 사는 것이다”라는 염세적인 잠언을 일기장에 끼적거리는 조숙한 소녀였다면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도록 했겠지.

당신은 여러모로 읽어내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서툴게 번역된 책처럼 문장은 아리송했고 문맥은 요령부득이었다. 당신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당신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커피나 차를 마시겠냐는 질문 앞에서조차 한참 망설이다 “선생님이 마시는 걸로요”라는 말을 겨우 내뱉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안도했다. 내가 권해준 책에 대한 감상을 물으면 초식동물의 그것처럼 순하고 놀란 듯한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저 같은 게 뭘 알겠어요”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도무지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소침한 당신의 눈빛이 품고 있을 지옥을 가늠하는 일이 나로서는 난망했다. 독서를 통해 당신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독서카드를 작성하다 말고 당신은 주저하며 물었지. 죄송하지만 선생님, 어떤 책을 읽으면 칠 년 사귄 남자친구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구질구질하게 울거나 후회하지 않고 끝장낼 수 있을까요? 당신이 독서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진정 그것이었을까? 고작 그것이었을까? 혹시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지못해 던진 농담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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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 참 좋구나.
그럼 나는 어떤 책을 읽어야 치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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